러시아는 오랫동안 서구의 거듭된 압박과 차별을 받으면서 제대로 반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듯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서구를 추종하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는 서구 바라보기, 문화적 열등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 역사적인 '서구 맹종'과 문화적 열등감
오래 전부터 러시아 상류층에게 유럽, 특히 프랑스 파리는 문명의 정점이자 유일한 정답이었다. 귀족들은 파리에서 유행하는 최신 드레스와 정장을 비싼 값에 공수해 입었고, 파리식 요리와 와인을 즐겼다.
심지어 러시아의 황제들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를 근대화시킨 표트르 대제는 "유럽을 닮아야만 낙후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귀족들의 전통 수염을 강제로 자르게 하고 유럽식 의복을 입혔다. 러시아의 궁전들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통째로 모방해 지어졌다.
러시아 지배층은 자신들을 '낙후된 아시아'가 아닌 '선진적인 유럽 문명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쓰고 유럽의 학문과 제도를 정답으로 여기며, 서구에 대해 일종의 문화적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파리는 영혼의 고향이었던 셈이다.
BBC 드라마 《전쟁과 평화(War & Peace)》의 도입부에는 러시아 고위 귀족들이 모여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는 화려한 파티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러시아 상류층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보다 적국이었던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더 숭상했다.
2. 소련 붕괴 직후의 처참한 국력 1991년 소련이 붕괴한 후, 새로 출범한 보리스 옐친 정권은 미국과 서방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러시아는 경제 파탄을 겪으며 서방의 원조와 IMF 차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다.
국방비마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군대가 해체 직전까지 몰렸던 시기였기에, 서구가 약속을 어기고 나토(NATO)를 동쪽으로 확장해도 물리적으로 반발할 힘 자체가 없었던 소극적 시기였다.
3. 초기 푸틴 정권의 '유럽 통합' 미련 2000년 집권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집권 초기에 철저한 친서방·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러시아를 '유럽의 평등한 파트너'로 편입시키는 것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푸틴은 과거 인터뷰에서 "러시아도 나토에 가입할 수 있다"고 언급했을 만큼 서구 중심의 안보 체제에 동참하려 노력했다.
서구가 자국을 무시하고 신뢰를 저버려도(민스크 협정 우롱 등), 러시아는 서구와의 경제적 결속(가스·석유 수출 등)을 유지하며 대화로 풀 수 있을 것이라는 미련과 외교적 착각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이 시기의 조심스러운 행보들이 외부에는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대처로 비쳐졌다.
4. 짝사랑의 비극, 그리고 멈춰버린 맹종 러시아는 오랫동안 서구에게 "우리도 너희와 같은 유럽인"이라며 다가갔지만 서구는 단 한 번도 러시아를 동등한 동반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아시아의 피가 섞인 야만인"이라는 차별과 멸시 뿐이었다.
서구는 외교적으로 민스크 협정 파기와 나토 동진을 통해 끊임없이 압박했다. 수백 년간 이어온 '서구 짝사랑'의 대가는 결국 처절한 배신과 안보 위기였다. 서구가 우크라이나의 나토화 추진을 강행하자, 안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서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러우 전쟁의 원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지배층이 수백 년 동안 품어온 '서구에 대한 미련과 맹종을 완전히 끝내겠다는 선언'과 같다. 파리를 동경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했던 러시아는, 이제 서구가 자신들을 결코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뒤늦게 깨닫고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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